고산문학의 국문학사상 위상 연구
고산은 윤유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큰집에 손이 없어서 종손으로 양자를 갔다. 윤선도의 양부는 윤유기다. 지금 해남에는 해남 윤씨 종갓집과 그 유품들이 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이곳이 윤선도의 본가이다.
그가 30세 때에 이이첨의 무리들이 광
여기에 든다
을 중심으로 한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을 짓기도 했다.
또한 송강 정철은 본래 성질이 곧아서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시 조정의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즐겨 회자되고 있다.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8세에 해남에 있는 백부 윤유기(尹惟幾)의 집에 대를잇기위해 양자로 들어갔는데 원래는 유심의 둘째 아들이다. 당시에 해남윤씨 가문은 굉장한 부호였고 명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라났던 해남 연동은 굉장히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문학의 일인자로 언어의 조탁이 뛰어나며 , 특히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작가이다. <고산유고>에 실린 이 작품은 그가 보길도의 부용동에 은거할 때 지은 것으로 춘하추동에 따라 변하는 어부의 생활과 경치를 읊은 연장체 형식의 연시조이다. 네 계절에 따른 어부 생활의 풍취와 자연 경관을 생
자연에 묻혀 지냈다. 이때 금쇄동에서 소박한 산중생활과 한가한 정서를 읊은 것이“산중신곡”, “속 산중신곡“들이었고,65세(효종2,1651)에 보길도의 춘하추동을 배경으로 지은 것이 ”어부사시사“이다.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은 윤선도 시가문학의 2대 산실이 된 것이다.
효종이 즉위한 후 봉림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여유와 흥취
어부가의 형성과정 : 어부가(漁父歌, 고려, 작자 미상) → 어부가(漁父歌, 조선, 이현보 개작)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조선 후기, 윤선도)
1651년(효종 2) 윤선도(尹善道)가 지은 단가(短歌). 보길도(甫吉島)를 배경으로 지은 40수의 단가로, ≪고산유고 孤山遺稿≫
작품 전반에 걸쳐 시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을 볼 수 있다.
날이 덥도다 믈 우희 고기 떳다 <춘사2>
동풍(東風)이 건듣 부니 믉결이 고이 닌다 <춘사3>
마람 닙희 바람나니 봉창( 窓)이 서늘코야 <하사3>
주대 다사리고 뱃밥을 박앋나냐 <동사2>
이처럼 고산은 어부사시
강호 자연에서의 어부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며, 제5수에 가서는 현실 사회를 잊지 못하는 시인의 내면 의식을 보여 준다. 결국 이 작품은, 실제로 강호 자연으로 물러난 시인이 강호 자연과 현실 사회의 대조를 통해서 시인의 내면화된 현실 지향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聾巖 李賢輔는 1467년(세조 13년)7월 29일 安東 禮安 汾川里에서 태어났다. 字는 斐仲, 號는 聾巖,雪靈翁이고 本貫은 永川이며, 諡號는 孝節公이다.
聾巖은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에 증직된 李欽과 호군이었던 권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才致가 뛰어나고 골상이 비상하였다. 9세에